보리스 목격 일지


2022.11.4

보리스가 화가 나 꽁무니를 치켜들고 붕붕거렸다.


2022.11.11

보리스가 이제 설탕물은 지겹다고 말했다.
월동 준비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걸.
이렇게 말을 하는 자신이 싫었다.


2022.12.5

보리스를 만날 수 없었다. 톰에게 물어보니 오늘은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한다.




벌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 둘


대화1

저게 남가뢰 애벌레거든요?

아…….(아무것도 보이지 않음.)

지금 꽃 위에서 노란 애벌레들이 이파리 흉내 내는 게 보이죠?

아……. 저거 말씀인가요?(아무것도 보이지 않음.)

네. 움찔움찔 움직이잖아요.

네에…… 정말.


남가뢰 애벌레

기진으로서는 남가뢰 애벌레……라는 것은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가죽희의 손끝을 따라 다다른 곳에는 한 계절 이르게 떨어진 나뭇잎들뿐인걸. 강아지풀. 강아지풀도 있었다. 강아지풀, 예전에는 참 많았던 것인데 왜 이렇게 오랜만인 걸까? 기진은 네에, 대단해요, 꽃잎을 흉내 낼 생각을 다 하다니, 대꾸하며 어린 시절 강아지풀로 해 내던 장난들을 떠올리는 데 온 신경을 기울였다.

그때 가죽희의 손가락이 무언가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제야 기진은 비로소 가죽희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통통한 호박벌이 곡선 비행 중이었다. 호박벌은 공중으로 솟구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같다가도 이내 아래로 가라앉기를 거듭했는데, 호박벌을 육안으로 관찰하는 것이 처음이었던 기진은 호박벌은 본래 이렇게 위아래를 오가며 목적지를 찾아가는구나, 포식자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서일까? 가설을 세웠다. 곤충의 본성이란 참 신기하지. 무엇 때문에 저렇게 날게 된 것일까? 가죽희의 선산이 하늘 위로 날아오를 수 있다면 그 복슬복슬 둥근 몸체가 호박벌과 같은 모습일 것 같은데. 그러나 호박벌은 기진의 호박벌 이상비행론이 그럴 듯한 원인을 찾아내기도 전, 얼마 못 가 추락하고 말았다. 그제야 기진은 남가뢰 애벌레가 무엇인지 비로소 볼 수 있었다.


대화2

꽃잎 위에 떼를 지어 자리를 잡고,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처럼 움직임을 연출해 호박벌을 꼬여 내는 거예요. 호박벌이 꽃잎 위에 앉으면 남가뢰 애벌레들이 털 속으로 파고드는 거죠. 호박벌이 벌집에 도착하면 그때 벌 밖으로 나와서, 호박벌들의 애벌레들을 훔쳐 먹으려고요. 그런데 이렇게 호박벌이 벌집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추락해 버리면 쌍방이 죽은 목숨. 호박벌은 남가뢰 애벌레들에 둘러싸여서, 남가뢰 애벌레들은 호박벌의 털 속에 파묻혀 따뜻하게 죽어 가게 됩니다.


호박벌

가죽희는 그렇게 말하며 호박벌이 애벌레를 털어 내려는 꿈틀거림이 그저 몸부림에 그치지 않도록 가느다란 나뭇가지로 털 사이를 툭툭 기막히게 골라 주었다. 호박벌 털 곳곳에서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스물한 마리부터는 세기를 그만둠.) 우글우글 튀어나오는 남가뢰 애벌레는 노오란 빛깔이 마치 호박벌이 낳은 새끼 같았으나, 애벌레를 모두 털어낸 호박벌은 곧장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이내 힘을 잃고 추락했다.


대화3

나뭇가지로 날개 쪽을 잘못 건드렸나 보네요. 그냥 애벌레들에게 죽게 두는 게 나았겠어요.

호박벌도 치세요?


단 둘

호박벌도 애벌레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선산 위에서, 문득 기진은 가죽희와 단 둘이 남았다는 실감이 들어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을 건네 보았으나 가죽희는 이렇게 답하였다. 듣던 대로 결코 상냥한 편은 아닌 것 같았다.


대화4

호박벌은 치는 게 아니에요. 호박벌은 혼자 사니까.